Manicu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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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골목을 천천히 읽는 하루

인터랙션 확인용 더미 매거진

아침에는 창문을 열고 골목의 소리를 먼저 들었다. 배달 차량이 멈췄다가 출발했고, 맞은편 집에서는 이불을 터는 소리가 났다.

글 · KM

5분 읽기
안녕

유리창에 겹친 풍경 같은 길에서도 멈춰 서는 자리는 매번 달라진다. 문을 열기 전의 가게 유리에는 거리와 실내가 한꺼번에 비쳤다. 진열대 뒤로 버스가 지나가고, 천장 조명 위로 전선이 이어졌다. 카메라를 들었다가 반걸음 옆으로 움직이니 전혀 다른 구도가 되었다. 같은 자리에 서 있어도 보는 위치에 따라 장면은 계속 바뀌었다.

유리 표면의 작은 얼룩까지 사진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것을 피하려고 했지만 몇 번 움직이다가 그대로 두었다. 깨끗하게 정리된 화면보다 조금 어수선한 쪽이 그 거리와 더 잘 어울렸다. 사진을 확인하지 않고 카메라를 다시 내렸다.

빈 의자가 있는 곳 골목 끝 작은 공원에는 서로 다른 방향을 보는 벤치가 있었다. 그늘진 쪽에는 물기가 남아 있었고, 햇빛을 받는 쪽은 이미 말라 있었다. 가방을 무릎 위에 놓고 앉았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운동 기구와 자전거 한 대,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는 나무 그림자였다.

잠시 뒤 개를 산책시키던 사람이 지나갔다. 개는 벤치 다리 앞에서 한참 냄새를 맡았다. 주인은 줄을 당기지 않고 기다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자리에서도 누군가는 충분히 바쁘게 무언가를 알아보고 있었다.

PORTRAIT / 2:3 비율의 추상 풍경 더미 이미지 PORTRAIT / 2:3 · 클릭하여 확대 빛이 옮겨 가는 동안 구름이 해를 가리자 벤치의 색이 순식간에 짙어졌다. 조금 전까지 눈에 띄던 그림자의 경계도 흐려졌다. 빛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노트를 펼쳤다. 무엇을 봤는지 적으려 했는데 첫 문장부터 자꾸 설명이 길어졌다. 결국 장소와 시간만 짧게 적었다.

좋았다는 말을 붙이기 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남겨 두고 싶었다. 나무 아래 빈 병, 신발에 묻은 흙, 멀리서 들린 공사 소리. 이런 조각들이 나중에는 그날의 기분을 더 정확하게 알려 줄지도 모른다. 문장 사이에 넓은 여백을 남겼다.

작은 가게의 선반 돌아오는 길에 문구점에 들렀다. 새 노트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문 앞 바구니에 놓인 연필들이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선반에는 두께도 색도 다른 종이가 쌓여 있었다. 손끝으로 표면을 만져 보니 매끈한 종이와 거친 종이의 차이가 생각보다 컸다.

가게 주인은 같은 연필을 오래 쓰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익숙한 무게와 손에 닿는 감촉 때문에 다른 것을 골랐다가도 돌아온다고 했다. 나는 집에 있는 연필을 떠올리고 작은 지우개만 샀다. 새 물건을 고르는 시간도 지금 가진 것을 다시 살펴보는 계기가 되었다.

SQUARE / 1:1 비율의 추상 풍경 더미 이미지 SQUARE / 1:1 · 클릭하여 확대 돌아가는 길을 바꾸다 집까지는 큰길로 가는 편이 빨랐지만 낮은 담장이 이어지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담장 위에는 화분들이 줄지어 있었다. 같은 크기의 화분인데도 잎이 자라는 방향은 제각각이었다. 어느 집 대문 앞에는 젖은 우산이 펼쳐져 있었다. 아침에 다른 곳에는 비가 왔던 모양이다.

길이 좁아지니 걷는 속도도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자전거가 지나갈 때는 벽 쪽으로 몸을 붙이고 잠깐 기다렸다. 지도에서는 한 줄로만 표시되는 길에 이렇게 많은 높이와 표면과 소리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다음에는 반대 방향에서 걸어 보고 싶었다.

사진을 고르는 기준 집에 돌아와 카메라를 연결했다. 비슷해 보이는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가장 선명한 사진부터 고르다 보니 막상 기억하고 싶었던 순간이 빠졌다. 손이 조금 흔들린 사진에는 바람에 움직인 나뭇잎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사진을 지우지 않기로 했다.

잘 찍힌 사진과 다시 보고 싶은 사진이 꼭 같지는 않았다. 모서리에 지나가는 사람의 어깨가 들어온 컷도 남겼다. 프레임을 완벽하게 정리하는 데 신경 썼다면 그때 들었던 소리까지 잊어버렸을 것 같았다. 고른 사진은 따로 폴더를 만들어 여섯 장만 넣었다.

WIDE / 16:9 비율의 추상 풍경 더미 이미지 WIDE / 16:9 · 클릭하여 확대 화면에서 종이로 사진을 작은 크기로 인쇄해 책상 위에 펼쳤다. 화면에서는 밝게 보이던 부분이 종이에서는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이미지를 한 장씩 넘기는 것과 여러 장을 나란히 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비슷한 색을 가진 사진끼리 놓으니 걷던 순서와는 다른 이야기가 생겼다.

설명을 먼저 쓰지 않고 사진 사이의 간격을 바꾸어 보았다. 가까이 붙이면 하나의 장면처럼 보였고, 멀리 떼어 놓으면 각자 오래 바라보게 되었다. 빈 공간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실제로 놓아 보기 전에는 알기 어려웠다. 책상 끝에 한 장을 더 둘 자리를 남겼다.

기록에 붙이는 말 사진 아래에 짧은 문장을 적었다. 처음에는 분위기를 설명하는 단어를 여러 개 썼다가 대부분 지웠다.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적는 것으로 충분했다. 읽는 사람이 내가 느낀 것과 같은 기분이 되기를 기대하기보다, 각자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목은 마지막까지 정해지지 않았다. 거창한 의미를 붙이면 평범했던 산책이 다른 일처럼 느껴졌다. 날짜를 제목으로 썼다가, 자주 걸었던 골목의 이름을 덧붙였다. 앞으로 다시 걸을 날이 생기면 같은 이름 아래에 다른 사진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PORTRAIT / 2:3 비율의 추상 풍경 더미 이미지 PORTRAIT / 2:3 · 클릭하여 확대 저녁에 다시 보는 아침 해가 기울고 나서 아침에 쓴 노트를 다시 펼쳤다. 낮에는 대수롭지 않았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벤치가 마르는 속도를 적어 둔 한 줄이었다. 빛이 어디에 머물렀는지를 그 짧은 기록만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사진에 담기지 않은 것들이 글 속에는 조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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